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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스토리

서사가 깃든 정물
오래 된 사물에 주목한 사진가 3인의 작업이다. 추억과 사연이 깃든 잔잔한 정물사진은 지나간 시간과 사람을 향한 한 편의 시 같다.

이경수, hanbok #02, 16x20 inch, Gum Bichromate Print, 2019

 

검프린트 그리고 시간여행
이경수

행복했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이경수에게는 잠시나 시간여행을 경험한 그런 날이 있었다. 어느 날 시장 가판대에서 본 여러 다발의 꽃버선을 봤고, 그것이 잠시나마 ‘그때’의 기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시켜준 것이다. 당시 경험으로 말미암아 작가는 자신과 아내, 장모의 저마다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가 담은 가족의 오브제는 꽃버선, 한복, 족두리 등으로 이름만 들어도 따듯한 정이 느껴지는 물건들이다.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소환시킨 과거 물건들에 작가는 현재의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었다. 바로 검프린트(Gum Bichromate Print)를 통해서다. 그가 과정도 번거롭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검프린트를 선택한 이유는 과거에서 소환한 물건들이 현재에도 생명력을 갖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프린트 작업을 통해 변화하는 이미지 속 오브제들을 보면 2D가 3D로 변하는 놀라운 과정을 보는 듯하다.”라는 그의 말처럼, 오브제 색감과 종이 재질이 만남으로써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정이 결합된 것이다. 덕분에,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추억 속 물건들이 떠오른다. 닳도록 입었던 어린 시절의 옷과 아무 생각 없이 버린 장난감이 그렇다. 익숙할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는 말처럼, 그의 작품은 추억이 지닌 힘과 가치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과거 어딘가의 기억 속으로 잠시나마 여행을 떠나게 도와준다.

 

이경수, jogduli #02, 16x20 inch, Gum Bichromate Print, 2019

 

이경수, flower sin #02, 11x14 inch, Gum Bichromate Print, 2019

 


 

 

Baldwin 위의정물 #03, Archival Pigment Print, 50x40cm, 2017

 

손때 묻은 물건을 향한 위로
박미정

어두운 톤 때문일까. 사진 속 물건들은 얼핏 낡아 보이지만 고요하면서도 절제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진가 박미정의 물건들로, 그녀는 어느 날 구석구석 집 안을 살피다 구입한지 40년도 더 된 볼드윈(Baldwin) 피아노와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그릇들을 발견했다. 낡은 피아노와 그릇에는 그녀가 설렌 마음으로 사용하던 그날의 기억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탓일까. 흠집이 나 있고 두 조각으로 깨져 있는 물건들을 보니 무관심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흘러간 시간만큼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 것을 보며 작가는 문득 인간의 삶을 떠올렸다고 한다. 부질 없고 덧 없는 감정들 말이다. 그 이유 때문인지, 사진 속에 물건에 대한 위로와 미안함이 담겼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의 감정과 시선은 세월을 간직한 물건과 만나서 어둡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의 사진을 탄생시켰다. 어두운 톤은 회화적인 느낌을 주고자 한 것이고, 오래된 피아노 위에 놓고 촬영함으로써 정물에 담긴 세월의 의미를 호출하고자 했다. 그녀 작품을 천천히 바라보면, 오브제들이 마치 사람처럼 저마다 스토리를 품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조율조차 안 되는 피아노 위에 깨진 컵과 흠집 있는 물건들이 모진 풍파를 겪으며 살아가는 인간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미정은 자신의 물건들이 지닌 가치를 생각하면서 무관심했던 지난날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사진으로나마 위로하고 있다.

 

Baldwin 위의 정물 #06, 50x40cm, Archival Pigment Print, 2017

 

Baldwin 위의 정물 #10, 50x40cm, Archival Pigment Print, 2017

 


 

 

#01석작-Digital print 2019

 

어머니를 위한, 어머니에 의한
한상재

흘러가는 시간은 사람을 항상 긴장시킨다. 한상재 역시 그렇다. 어느날 갑자기 노모가 요양병원에 입원하면서 새삼 어머니에게 남아있는 시간과 삶에 대해서 초조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에 노모가 없는 텅 빈 집에서 어머니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다 우연히 석작 하나를 발견했다. 가늘게 쪼갠 댓개비로 만든 낡은 네모꼴 상자인 석작. 노모가 시집 오던 날 가지고 왔던 것일까. 도무지 알 길 없는 그 바구니 속에는 어머니의 세월과 감정이 응축된 물건들로 가득했다.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좀먹고 얼룩진 치마와 가계부를 비롯해 거울 같은 것들 말이다. 물건들을 보자마자 작가는 애잔함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손때 묻은 물건들이 93세 어머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아련한 감정은 작품으로 이어졌다. 그래서일까. 하얀 배경지를 선택한 이유는 어머니의 물건들을 담백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물건들이 한 여성의 인생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 속 물건의 길고 희미한 그림자가 나이테 마냥 노모가 살아온 세월을 짐작하게 만들어 준다.
“물건 하나하나가 엄마와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을 툭툭 튀어나오게 만든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물건 속에는 자신과 어머니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누구나 그렇듯, 아직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 이 물건들이 다가오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위로해주는지도 모른다.

 

 

#10석작-Digital print 2019

 

#03석작-Digital print 2019

 

김영주 기자  2021-02-25 태그 사진가, 정물,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