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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의 한국현대사진
이명호의 예술사진: 캔버스-재현효과 사진론 (1)

이명호의 예술사진: 캔버스-재현효과 사진론(1) 
이은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사진작가 연구 부재에 관한 문제의식
이명호의 첫 번째 나무 작업은 2004년이다. 나무를 찾아 헤맨 지 올해로 딱 20년이 되었다. 나무 작업은 곧 이명호 작가를 연상케 하는 확고부동한 대상이 되었다. 이명호는 20년 동안 나무뿐 아니라 바다, 돌, 풍경, 문화재 등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탐구를 시도했다. 이명호는 나무, 돌, 자연적 요소에 대한 관심에서 점차 인류 구축 문명의 대표로 꼽히는 문화재로 옮겨졌다. 오히려 자연과 문명에 대한 고민을 교차적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연풍광 속에서 문명적 요소를 거세한 <드러내다(2019-)> 시리즈도 완성했다. 이명호의 등단은 시작부터 화려했다. 첫 번째로 제작한 작품 곧바로 이슈화되었고,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알려졌다. 2009년 뉴욕의 사진 전문 요시밀로(Yossi Milo) 갤러리 전시를 시작으로 역동적인 해외 활동도 담보되었다. 첫 작업을 내놓은 지 5년 만이다.

 

《Among the tree》, Hayward Gallery, London, 2020

 

Opening_Yossi Milo Gallery, New York, 2009

 

ARTnews, New York, 2009

 

‘예술로서의 사진’이 갤러리에 수용된 시기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사이이다. 이 시기 인사동 일대에 사진 관련 전시가 양적으로 팽창했다. 해외에서 사진이론을 공부한 세대가 입국하면서 한국의 사진평론이 시작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몇몇 기성 작가들의 연구가 진행되는 것에 비해 젊은 사진작가 연구는 턱없이 부족했다. 작가론 분석이 활발해도 특정 대표작 위주로 작업 세계를 규정한다. 작가가 새로운 작업을 지속시켜도 평론은 이미 규정된 프레임에 갇혀 있다. 작가가 새로운 작업을 계속 생산해도 후속연구는 미비하다. 새로운 젊은 작가가 배출될 때 기성 작가들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카테고리화된다. 안정된 구조 속에서 새로운 것이 기존의 틀로 분석되는 위험이 있다. 새로운 기술과 형식을 제시하는 작업에 대한‘새로운 평론’이 전무했던 셈이다. 사진작가 역시 초창기 작업부터 순차적인 이론화 작업이 필요하다. 젊은 작가들에 대한 이론화 작업이 일찍이 시작된다면 향후 원로작가가 되어도 작품 해석에 관한 풍부한 담론이 형성된다. 2010년 전후로 현대사진에 관한 전시가 양적으로 팽창했다. 이명호는 사진이 미술 제도에 안정적으로 편입된 시기. 2000년대 초중반에 작업 활동 영역을 확장시켰다.

 

평범한 나무는 예술이론이 될 수 없을까
2020년 영국 헤이워드 갤러리에서《Among the tree》전이 열렸다. 2019년《베니스 비엔날레》예술감독이었던 랄프 러고프(Ralph Rugoff)가 기획한 전시였다. 바로 ‘나무’에 관한 전시이다. 나무를 소재로 다루고 있는 설치, 영상, 사진 등 전 세계에서 작업하고 있는 다양한 장르의 작가를 모았다. 2019년《베니스 비엔날레》전시의 호불호는 명확했다. 비엔날레 전시는 주로 예술감독이 대주제를 제시하고 그에 상응하는 개념들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 그 곳에서 의미체계가 성립되고, 이는 결국 전 세계 미술 체계의 이정표로 작동된다. 통상적으로 성공한 비엔날레에서 감각적인 작품은 명확한 개념으로 무장해야 하고, 감각과 논리의 조화가 정점을 이뤄야 한다. 감각과 논리의 변증법적 운율이 중요한 비엔날레에서 랄프 러고프는 2019년 전혀 다른 시도를 했다. 이 전시는 작업과 작업 사이에 벌어지고 연결되는 간극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게 했다. 대주제와 소주제의 고유 인식 체계, 논리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무화시켰다. 전시장에 설치된 작업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미가 끊어져 있다. 인류문명에서 이미 관습화된 논리 체계로 작업을 감각할 수 없다. 전 세계에 흩어져 다른 문화적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 오히려 각 개인의 관습체계에서 벗어나 타인의 삶을 보게 했다. 이러한 맥락이《Among the tree》전시에도 발현되어 있다. 우리는 나무가 울창한 거대한 숲에서 녹음을 보면서 편안해한다. 이러한 감각이 예술영역에 놓이면 어떤가? 감각의 논리에 ‘편안함’, ‘안도감’, ‘평정심’을 학술적 논제로 끌어올 수 있을까? 햇빛에 비치는 나뭇잎, 계곡 물소리 등으로 자연과 동화되는 현상을 과연 미술 이론으로 대치시킬 수 있는가. 예술은 자연을 모방해 왔지만 동시대 미술사조는 과연 그럴까? 동시대 미술은 온갖 새로운 기술의 등장을 품어야 했고, 전 세계에 퍼져있는 사회문제를 감당해야 했다. 오히려 자연이 주는 감각이 이론적일 수 없다는 공식은 오래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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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기자  2023-04-24 태그 테크놀로지 아트, 사진, 이주용, 이은주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