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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스토리

심상용 서울대미술관장의 사진칼럼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의 사진 읽기

민주주의는 충분하지 않다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의 사진 읽기

심상용(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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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영국인이 아닌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터너상을 수상하면서, 데뷔(1990) 이후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녔던 상업사진가의 딱지가 떨어져 나갔다. 볼프강 틸만스, 그는 비로소 성공한 예술가의 ‘진정한’ 반열에 올랐다. 탄탄대로(坦坦大路)는 2017년 런던 테이트모던에서의 대대적인 회고전, 2021년 비엔나 전, 2022년 MoMA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이어졌다. 

2022년 뉴욕 MoMA는 전시 제목을 《볼프강 틸만스: 두려움 없이 보기》(Wolfgang Tillmans: To look without fear)로 뽑았다. 대규모 회고전 성격으로, 작가의 삶을 아우르는 다양한 사진들이 전시되었다. 초상사진, 정치적인 성격, 대형 사이즈의 풍경 사진, 화학물질을 인화지에 노출시키는 기법연구에서 파생된 추상 사진들, 그리고 1980, 90년대 초 영국의 컬트 문화, 성 소수자의 일상, 노골적인 동성애나 자위 장면을 다룬 것들이 있다. 액자를 사용하지 않는, 편집형 디스플레이 방식은 ‘두려움 없이’(without fear) 금기를 넘어서는 그의 개방적, 민주주의적 세상 읽기를 덜 제한하기 위한 방식일 것이다. 

 

Wolfgang Tillmans <Freischwimmer 230(Free Swimmer 230)> 2012 © Wolfgang Tillmans

 

Wolfgang Tillmans <Lutz & Alex Sitting in the Trees(나무 위의 루츠와 알렉스)> 1992 C-print 40.6x30.5cm © Wolfgang Till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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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 큐레이터 마커스 번연(Marcus Bunyan)은 틸만스의 사진들이 거리에서 마주칠 것 같은 사람들, 주석 없는 일상을 담아냄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민주적인 방식’을 더 멀리까지 밀어붙였다고 한다. 크리슈나무르트(Jiddu Krishnamurti)를 인용하여 틸만스의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야말로 “세계의 무한한 굴절에 개방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이자 “세상을 꿈속을 거닐 듯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고, “세계정신(world spirit)의 에너지와의 연결에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무한히 굴절하는-변화하는- 세계에 개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떠한 사진을 한다는 것인가? 개방적인 태도로 ‘세계정신’을 수용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가디언’의 미술평론가이자 RCA의 객원교수인 아드리안 설(Adrian Searle)은 테이트모던의 전시(2017) 리뷰에서 틸만스의 방법론에 대해 이렇게 함축한다. “틸만스의 사진들은 모두 일종의 증거이며, 의미를 찾기 위해 자료를 샅샅이 뒤지는 작업이다.” 시대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어떤 철학적 연관성도 부재해 보이는 자료들을 찾아내는 근 30년의 탐사, 그것이 그의 사진적 성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각각의 것들 너머에서 의미에 해당하는 뭔가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은 대체로 무의미하며, 설사 뭔가가 있더라도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전적으로 감상자의 몫일 뿐이다. “관객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 사물의 관계를 해체, 조합하거나 심화할 수 있다”고 설은 말한다. 참으로 편리하고 민주주의적인 위임이다. 문제는 관객이 자신에게 무엇이 얼마만큼 필요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긴 민주주의는 편해야 한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왜 누군가가 예컨대 예술가가 더 많이 생각하고 느끼는 불편을 겪어야 하는가?)

 

아드리안 설은 또 틸만스의 사진들이 “교훈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을 삶의 교차점(The nexus of life)으로 안내한다”고 한다. 하지만 관객은 그 교차점이 무엇인지, 어디쯤에서야 만나게 되는 건지에 대해서 잘 안내받지 못한다. 그 사진들이 안내자로서는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안내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에 부합되어야 한다. 첫째, 안내자가 종착지 또는 그 방향에 대한 상대적으로라도 더 나은 수준의 지식을 지닐 것,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로 안내되는지에 대해 알고 동의하는 것. ‘아름다움은 관객의 눈에 있다’는, 지난 세기 내내 무분별하게 살포되어 온, 탈 철학적인 담론은 그러한 조건에 조금도 부합되지 않는다. 

 

이 포스트 담론의 기원은 발트해 독일의 동물행동학 연구자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J. 1864–1944)의 ‘움벨트(Umwelt)’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움벨트 이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각각의 주체로, (자신의 신체적, 경험적 행동을 통해) 각자만의 고유한 현상 세계인 ‘움벨트’에 살고 있기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수만큼의 움벨트가 존재하며, 따라서 세계의 연관성을 밝히는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인 설명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각각의 것들을 수집하는 것 외에, 시대의 굴절에 반응하는 다른 사유의 길은 없다는 포스트모던 가설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동물 행위 이론을 사유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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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기자  2024-10-04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