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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스토리

작업실 기록하는 사람들
현실적인 사진으로, 유머러스한 드로잉으로, 혹은 거친 페인팅으로 생생하게 기록된 손때 묻은 작업실의 초상과 작업 스토리.

아티스트에게 작업실은 종종 영감의 원천이 된다. 여기 모인 남기성&홍채원, 정정엽, 최진욱의 작품이 그런 경우다. 현실적인 사진으로, 유머러스한 드로잉으로, 혹은 거친 페인팅으로 생생하게 기록된 손때 묻은 작업실의 초상과 작업 스토리.
 

위 (왼) 홍채원, 화가 A씨의 작업실, 50x75cm, 2018 (오) 남기성, 화가 L씨의 작업실 먼지, 75x110cm, 2018

아래 (왼) 남기성, 조각가 P씨의 작업실 먼지, 75x110cm, 2018  (오) 홍채원, 화가 K씨의 작업실, 110x165cm, 2018

 

저마다의 소우주를 담다
남기성&홍채원

사진만 보면 적나라한 먼지들과 어수선한 작업실 풍경에 고개가 갸우뚱할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아티스트의 ‘폼나는’ 작업실과는 거리가 멀다. 작업실에서 채집한 먼지를 포착해 촬영하는 남기성과 작업공간의 주변 환경을 찍는 홍채원, 이들의 시선은 뚜렷하게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화가 K씨’, ‘조각가 P씨’처럼 익명으로 제목을 붙인 사진 덕분인지, 꾸밈없이 솔직한 작업실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속 장소들은 수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12명의 아티스트들의 열정이 담긴 작업실이다. 이들은 2년 전부터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러 번 작업실을 방문하고 작가들과 소통하다 보니 10개월이 소요되었다. 무엇보다도 작업실의 피상적인 기록이 아닌, 그 공간을 작가의 ‘정체성이 담긴 곳’으로 여기고 의미를 부여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얼마 전 실험공간 UZ에서 진행된 전시를 통해 그 결과물을 공개하기도 했다. 남기성의 ‘먼지’ 시리즈는 작업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공간 구석구석에 쌓이기십상인 흙먼지, 작품을 포장하는 스티로폼, 심지어 바퀴벌레와 머리카락까지 작업실이 지닌 오랜 흔적을 담고 있다. 반면, 홍채원은 조금 더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작업실의 소품, 작업도구, 작가의 손 등 다양한 소재를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한과 삶을 조용히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만 같다.
남기성, 홍채원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그들의 열정을 보며 작가의 존재 이유는 곧 작품밖에 없구나 하는 경외심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난방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한 작업실부터 온갖 잡동사니로 꽉 차 있어 마치 고물상을 연상케 하는 곳까지 그들이 사진에 담은 12인의 작업실은 예술가에게 있어 하나의 ‘소우주’인 셈이다.

 

(왼쪽부터) 정정엽, 나의 작업실 변천사1985, 트레싱지 위에 잉크, 41x 58cm, 2005 / 정정엽, 나의 작업실 변천사2002, 트레싱지 위에 잉크, 41x 58cm, 2005 / 정정엽, 나의 작업실 변천사2016, 트레싱지 위에 잉크, 41x 58cm, 2016
 

나의 작업실 다이어리
정정엽

한 중견 미술가의 삶과 작업 여정이 여실히 묻어나는 작업실 드로잉이다. ‘여성예술가의 정체성’, ‘소수에 대한 성찰’ 같은 심각한 주제를 다뤄온 그녀의 회화작품과 달리, 드로잉만이 가진 간결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매력이 돋보인다. 마치 누군가의 사적인 일기장를 엿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현재 안성 미리내에 위치한 작업실에 정착하기까지 정정엽은 33년 동안 무려 15차례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딱 맞는 작업 공간을 얻기 위한 그 기록들을 따라가다 보면 생동하는 정정엽의 시간들을 만날 수 있다.
시리즈는 1985년부터 2017년까지 1년씩을 한 장으로 기록한 34점의 드로잉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혜화동에 화실 겸 작업실을 얻었던 설렘의 기억부터 이리저리 치이고 옮기면서 지금의 감개무량한 작업장을 얻기까지 ‘작업실의 변천과정’을 담았다. 밤샘 작업으로 침낭 속에서 눈을 붙이는 작가들의 모습, 세탁소 건물 작업실에 걸어놓은 빨간 작업복… 즉흥적으로 쓱쓱 그린 것 같은 드로잉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기억과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집에서 결혼자금을 미리 받아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벌건 대낮 두 눈 버젓이 뜨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켜보다’, ‘안성 작업장에서의 5년의 작업으로 <벌레(Bug)> 개인전을 연다’ 등 그림과 함께 손으로 직접 적은 글에는 작업실에 얽힌 추억과 사연, 사회적인 이슈까지도 담겨있다. 정정엽은 이 작업을 <나의 작업실 변천사 1985-2017> 전시를 통해 공개했다.
정정엽에게 작업실이란 한마디로 ‘머뭇거리고 서성거릴 수 있는 공간’이다. 긴 세월 동안 혼자 망설이거나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했던 곳, 가능성을 찾아 두리번거렸던 곳.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작업실’이 있길 소망한다고 말한다.

 

최진욱, 생각과 그림, Acrylic on canvas, 227x409cm, 1990


자유분방, 공간의 리얼리티
최진욱

눈앞에 펼쳐지는 사물, 풍경을 강렬한 페인팅으로 재해석하는 최진욱의 작업실 시리즈다. 투박하고 대담한 표현이 특징인 그의 그림을 보면 감정과 감각을 자유롭게 담은 표현주의 회화들이 떠오른다. 작가의 눈에 들어온 작업실 풍경은 꽤나 예술적이다. 바닥에 놓인 석고상들, 오랜 작업 기간을 예상하게 하는 겹겹이 쌓인 캔버스, 디테일을 알아볼 수 없지만 각종 미술 도구들까지. 아티스트적인 면모가 거친 이미지 사이로 은연히 다가온다.
사실적으로 대상을 화폭에 옮겨 놓았으나 그의 작업실은 현실을 벗어나 있는 것만 같다. 왠지 불안해 보이는 흑백 명암과 자유분방한 붓 터치, 일부러 흩트린 원근감 등 작가의 감각에 따라 변주되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실적으로 현실을 재현하는 리얼리즘 미술을 추구하지만, 작가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감성적 리얼리즘’을 그림에 도입하고자 한다. 현실을 스토리가 아닌 ‘감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다. 일상과 밀접한 작업실이지만 그 의도대로 낯설게 느껴지도록 표현하는 셈이다.
<생각과 그림>은 왼쪽에 생각에 잠겨있는 인물과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오른쪽 인물이 둘 다 작가의 초상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줄곧 그려온 정물을 떠나 80년대 후반 잠시 추상화에 길에 들어섰던 최진욱은 90년대에 다시 사실적인 그림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새로운 출발점이 바로 작업실 프로젝트였다. 여느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수차례 이사를 다니며 작업실을 옮긴 최진욱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연희동 작업실이었다. 비교적 조용한 동네였고, 산과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고. 무엇보다 대표작이 나온 공간인 만큼 뭔가 특별한 기운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작업실에서, 작업실을 보고 그리며 그는 언젠가 더 넓은 세상을 화폭에 담자고 다짐한다.

 

 

박윤채 기자  2018-10-24 태그 작업실, 홍채원, 남기성, 정정엽, 최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