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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스토리

역사로 보는 한국 초상사진
초상화에 가까운 사진부터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인물사진, 개념을 강조한 인물사진까지. 우리나라의 초상사진의 역사.

우리나라의 초상사진은 어떤 변화과정을 거치며 발전해왔을까. 초상화에 가까운 사진부터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인물사진, 개념을 강조한 인물사진까지. 우리나라의 초상사진 계보를 최인진의 <한국사진사>(눈빛)와 2013 서울사진축제 도록 <시대의 초상 초상의 시대>, 그리고 몇 편의 논문을 참고해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서양인 최초로 조선 국왕의 공식 초청을 받아 조선에 온 로웰이 촬영한 고종. 1884

 

사진계의 얼리 어답터
1839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다게레오타입’을 발표한 이후 사진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열외였다. 유럽과 미국에서 사진 문화가 전파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거리도 한 가지 이유였겠지만, 이보다 더 큰 요소로 작용한 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아시아 국가들의 폐쇄적인 태도였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사진 문화를 받아들인 나라가 있었으니, 중국과 일본이다. 


중국에서는 청나라 말기 발발한 영국과의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을 기점으로 사진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그 대가로 난징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게 된다.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다섯 개의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방해야만 했고, 그 결과 외국 상인들과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게 됐다. 이때 함께 유입된 것이 사진술이다. 일본은 네덜란드 상선에 의해 사진이 수용됐다. 1840년대 초인지 말인지 그 시기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어용상인 우에노 순노지요우(上野俊之函)가 네덜란드 상선을 통해 수입한 다게레오타입이 일본에 전래된 최초의 사진술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주지하다시피 1840년대의 우리나라는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외국과의 통상교섭을 거절했고, 과학기술은 유입이 금지됐으며, 천주교는 박해됐다. 그러나 청나라와의 교류는 어느 정도 유지했다. 그럼에도 사진술이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진술 유입에 비로소 숨통이 틘 건 1860년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쳤던 시기였지만, 예전부터 지속해온 청나라와의 교류가 큰 역할을 했다. 아무나 청나라와의 교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식 사절단에 선정돼야 청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사진을 접하고 또 찍었던 인물은 이의익이다. 1863년 그는 사절단 진하겸동지사은사(進賀兼冬至謝恩使)의 정사(사신 우두머리)가 되어 베이징에 파견됐다. 공식 일정을 시작하기 전 방문한 사절단은 러시아관(옛 고조서관)에서 사진을 처음 접하게 된다. 그곳에서 초상사진을 본 그들은 사진의 정교한 묘사에 매료됐고, 너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이들은 우리나라 사진의 ‘얼리 어답터’이자 초상사진의 태동이었다. 제일 먼저 사진을 촬영한 이의익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진사가 탁자를 하나 설치했는데, 탁자 모양은 우리나라의 말안장과 같은 것이었다. 가로형의 나무 양 머리에는 파리(렌즈)를 부착했으며, 청색으로 된 보자기로 앞면을 가려 두었다. 탁자 북쪽 편에 나를 앉힌 다음 움직이면 절대 안 된다고 지시하고 (…) 방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조금 후에 나와서 탁자 앞의 파리를 빼고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오래되어 파리를 다시 끼운 후(…) 방안의 연등을 켜고 잠시 있다가 파리를 항아리의 물에 씻은 후 곧바로 나와서 나에게 보여주는데 나의 전면이 파리에 옮겨져 있었다. 비슷한 것이 아니라 완연한 내 모습이었다.”

 

사진이 대중화되기까지
이렇듯 호기심 가득한 사신들이 초상사진을 찍긴 했지만, 그 결과물을 갖고 들어오는 것까지 허락되진 않았다. 쇄국정책 때문이었다(1872년 사절단의 수석역관이었던 오경석은 중국에서 촬영한 자신의 초상사진을 가져오는 모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 임금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봄)을 선포하면서 문호를 개방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에 사진술이 널리 알려지게 된 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 수신사(修信使)의 공로가 크다. 1876년 김기수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사진관에서 초상사진을 촬영했고, 1880년 김홍집 역시 일본에서 전신상을 촬영했다. 


물론, 쉽진 않았다. 외래 문물을 향한 배타적인 시선이 여전히 존재했고, 카메라에 대한 선입견도 작용했다. 카메라를 대포 같은 무기로 생각하기도 했으며,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사라진다는 유언비어도 있었다. 그러나 상류계층과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서 사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사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자신의 초상을 남기고 싶어 했다. 초상화보다 저렴한 가격이지만, 자신을 더 자세히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건 1895년 실시된 단발령이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기 전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남길 수 있는 방법으로 초상사진을 택했다.


초상사진의 영역도 확대됐다. 개인을 위해 사용된 것뿐만 아니라 가족행사, 장례식, 기념식, 졸업식, 정부 기관에서 증거를 남기는 데 초상사진이 사용됐다. 평범한 사람들도 점차 초상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됐다. 고종 황제의 공이 컸다. 그는 카메라 앞에 자주 섰으며, 그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선보였다. 초반에는 전통적인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과 비슷한 사진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고 친근한 사진을 선보였다. 이는 조선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외교 활동 성격이 짙었다. 일종의 통치 수단으로도 사용됐다. 대중화된 고종 사진은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좌) 신칠현, <자화상>, 1929  (우) 주명덕, <섞여진 이름들>, 1960년대

육명심, <경상북도 안동_ 백민>, 1983

 

사진 세계로의 입문
이렇듯 한국사진의 출발은 초상사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0~1890년대 개설된 사진관에서 주로 촬영된 것이 초상사진이었던 점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사진관 주인들 역시 중국과 일본에서 초상사진을 배워온 김용원, 지운영, 황철 등이었다. 당시의 초상사진은 ‘전신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대세였다. 전통적인 초상화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시키면 안 된다는 유교적인 통념 때문이었다. 전신상은 곧 ‘살아 숨 쉬는 나’ 그 자체였다. 이러한 촬영 트렌드는 사진관의 개성과 소도구를 이용한 촬영 방법이 퍼지면서 달라졌다. 점차 서양식 탁자와 의자, 화분, 책자 등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신분의 고상함을 드러내기에 제격인 소품들이었다. 고위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계층에게도 인기가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얼굴 중심의 초상사진이 정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전신에 대한 강한 집념이 문제였다.


1920년대 캐비닛판(12x16cm)이라는 대중판이 일반화되고, 사진을 벽에 걸어놓는 일이 늘어나면서 초상사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사진관 내부가 점차 편안한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음악을 트는가 하면, 긴 릴리즈를 이용해 대화 중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하기도 했다. 나라 안에선 전통적인 계급 질서가 붕괴되고 있었다(이미 김규진은 1907년 천연당사진관에서 여성 전용 촬영장을 별도 운영했다). 초상화 스타일의 딱딱한 사진은 과거의 유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사진사들은 외형보다 인물의 개성, 내면세계, 성격 등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신칠현의 ‘자화상’과 ‘몸’에선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사진 형식을 엿볼 수 있다. 미술사진이란 용어의 등장도 한 몫 했다. 렘브란트 조명 같은 빛의 사용, 백금사진, 엷은 갈색 톤의 사진 등이 예술적 분위기를 강조했다. 신흥 부르주아 계층은 이러한 새로운 초상사진이 자신의 사회적 신분 상승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초상사진에 수정 작업(눈·코 성형, 불필요한 부분 삭제)이 이뤄지기도 했다.


합성사진, 자연주의 사진, 인상주의 사진, 회화 테마를 모방한 사진 등 회화주의 사진도 등장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촬영해 특수인화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중심에는 신낙균이 있었다. 일본 도쿄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특수 인화법을 소개하면서 예술사진운동을 전개했다. 특수 인화법을 사용하면 밋밋한 포즈와 단조로운 조명 같은 스트레이트 사진의 결점도 멋스럽게 보완할 수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예술사진의 유행은 사진을 취미로 하는 새로운 계층을 탄생시켰다. 바로 아마추어 사진가다. 이들은 사진으로 돈을 버는 사진관 사진사와는 달리, 사진을 취미로 하는 애호가였다. 그들로 인해 예술사진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사진작업에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고, 파격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기틀을 마련한 건 정해창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사진 개인전을 개최한 인물이기도 한 그는 한국사진이 독창적인 미의식을 갖고 예술사진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초상사진은 기존의 정형화된 사진과 달리 과감했다. ‘몸’, ‘부채와 여인’, ‘그네와 여인’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리얼리즘 그리고 얼굴
1940~1970년대는 우리나라 사진이 회화주의(살롱사진)에서 리얼리즘 계열로 전환되는 시기다. 결정적인 사건은 6.25 전쟁이다. 전쟁을 겪은 사진가들이 ‘사진가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과 역사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사진에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회화적인 것보다 기록성을 강조하는 것이 곧 예술이었다. 리얼리즘을 토대로 다양한 사진 장르가 가지를 쳤다. 그래서일까. 이 시기에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과 비슷한 초상사진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오로지 인물에 집중했던 사진가도 찾기 힘들다. 사진에 인물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이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서 파생됐다는 느낌이 강하다. 주제 역시 해방, 분단,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주를 이룬다. 임응식, 이형록, 정범태 등의 사진을 비롯해 한국전쟁의 참담한 현실 중 하나인 혼혈아 문제를 다룬 주명덕의 <섞여진 이름들>과 이름 없이 살아온 민초들을 담은 육명심의 <백민>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흥미로운 건 광고와 잡지 표지 사진이다. 한국전쟁 이후 스스로 상품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우리나라에선 광고와 잡지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소비가 미덕이 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여성 초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인상적이다. 비록 홍보 목적이 강했고 정형화된 여성상을 제시하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많은 잡지가 여성 연예인을 모델로 채택했다. 박정희 정권의 농촌근대화 정책을 선전하는 목적으로 제작된 <새농민> 속 여성 초상은 대중성 확보를 위한 미끼 성격이 짙었고, 태평양화학(현 아모레퍼시픽)의 <향장>은 자사 화장품 판매를 촉진하겠다는 취지가 강했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초상을 담은 사진이 정부와 기업의 ‘먹고사는 리얼리즘’에 근간을 뒀던 셈이다.

 

김옥선, <Candie and Raymond_ Happy Together>, 2002

변순철, <전남 보성_ 전국노래자랑>, 2014

 

개념 초상 혹은 하이브리드 초상
1980년대 들어 국내 사진은 리얼리즘 형식을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비록 이때의 한국사진이 모더니즘을 수용하지 못한 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 계보가 물 흐르듯 이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지만, 어쨌든 이 시기의 한국사진은 현대사진 조류에 합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변곡점으로 1985년 출간된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와, 같은 해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구본창을 꼽을 수 있다. <현대사진의 조류>는 그 당시 해외 현대사진의 경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구본창의 사진을 통해선 해외 트렌드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결정타는 구본창이 기획한 <사진, 새 시좌>전(1988)이었다. 현대사진 경향을 급급하게 보여준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사진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사진가의 독창적인 시각이 중시되는 작가주의 사진이 등장한 것이다.


‘아마추어 사진’과 ‘스트레이트 포토’에서 ‘메이킹 포토’로 전환됐고, 사진에 개인의 감정과 생각이 담겼다. 사회적 이슈와 담론도 스며들었다. 사진이 개념미술 맥락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초상사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상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초상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내용이 형식을 지배한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강용석은 <동두천 기념사진>을 통해 남북분단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이상일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묘역에 찾아가 영정사진을 찍음으로써 속죄의 마음을 전했으며(<망월동>), 오형근은 초상사진을 통해 이태원 속 인간의 불안(<이태원 스토리>)과 대한민국 아줌마의 불안을 드러냈다.


이런 흐름은 2000년대 들어서도 이어진다. 김옥선은 초상사진을 통해 국제결혼을 향한 사회·문화적 편견을 생각해보게끔 했고, 박진영과 정연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삶을, 이선민은 30대 가정의 권태와 무기력함을 이야기했다. 윤정미는 현대사회 속 성 정체성에 대한 편견을 꼬집었다. 이외에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진가로는 강재구, 김인숙, 니키리, 신혜선, 이일우, 천경우 등이 있다. 권지현과 박초록, 배찬효, 안옥현, 주황 역시 독특한 초상작업을 하는 사진가들이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초상사진들의 공통점은 유형학적 범주에 개념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사진가는 상황에 최소한으로 개입한다. 이는 인물의 외모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데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초상사진의 사회과학화인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는 가운데 최근 눈에 띄는 건 SNS 상에서 유행하는 초상사진이다. 이들은 ‘유형학+개념’ 구성을 따르지 않는다. 이들은 ‘일반인 콘셉트 촬영’, ‘프로필 화보’ 등으로 불리며, 스냅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감성사진과 비슷한 파스텔 톤의 사진도 있지만, 대다수가 일본 로망 포르노(Roman Porno, 나름의 완성도와 주제 의식을 갖고 있는 성인물)를 떠올리게 하는 야한 사진들이다. 한 마디로 여러 가지가 한데 모여 어우러진 하이브리드 초상사진이다. 촬영은 아마추어와 프로 경계에 있는 사진가들이 전담한다. 김일권, 레든, 양동석, 한욱희 등이 SNS에서 회자되는 사진가들이다. 모델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특이한 점은 모델이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촬영을 신청하고 참여한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는 말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지만, 과감함을 요하는 사진이 큰 인기를 끈다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이는 1970년대 일본에서 이미 유행했던 현상이다). 촬영한 사진들을 공개하면 사진가와 모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아요’ 세례를 받는다. 스타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이러한 현상을 관찰하다 보니 문득 1920년대 초상사진이 떠올랐다. ‘분위기를 고조시킨 초상사진이 자신의 사회적 신분 상승을 대변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인기인이 됨으로써 얻게 된 우월감을 표출한다고나 할까. 진화된 전통 초상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은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새로운 초상 문화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신계급주의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 | 최인진(1999), <한국사진사>, 눈빛.  ‘2013 서울사진축제’  도록 <시대의 초상 초상의 시대>.  주형일(2003), ‘사진매체의 수용을 통해 본 19세기 말 한국 사회의 시각문화에 대한 연구’. 박평종(2007), ‘일제 시대의 “살롱사진” 형식이 해방 이후의 한국사진에 미친 영향’

박이현 기자  2017-08-10 태그 한국사진사, 서울사진축제, 신체발부수지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