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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전시

3 GUYS, 3 DAYS _ 김형석
김형석이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채집한 낯설지만 따뜻한 순간들을 공개한다.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 갤러리 10.16~10.21

 

 

 

 

2019년 10월, 열흘간의 부다페스트 출장이 끝나갈 무렵 지독한 장염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여행의 묘미는 계획대로 되지 않음에 있다지만, 처음 찾은 베를린에서 소시지도 맥주도 즐기지 못하고 약과 죽만 먹는 것은 조금 억울했다. 웬일인지 이탈리아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장 상태가 좋아져서 비로소 내가 와야 할 곳에 온 듯한 확신이 들었다.

 

밀라노에서 차로 서너 시간 떨어진 작은 도시 피에트라산타에는 먼저 도착해 진지를 구축해 놓은 두 남자가 있었다. 원래 계획했던 런던행 일정을 바꾸어 피에트라산타로 가게 된 경위는 현지에서 미술관 설립을 계획하고 있던 김관장님의 초대 때문이었는데 그곳에는 한 번 스쳐 뵌 적이 있던 최화백님도 함께 계셨다. 거의 처음 만난 것이나 다름없던 두 분과 3박 4일을 여행하며 보낸 시간은 이제 돌이켜 보면 꿈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느긋하게 걷고, 때로는 아이들처럼 뛰며 눈앞에서 기차를 놓치기도 했지만 두어 시간을 더 놀다가 다음 기차를 잡아타면 될 일이었다. ‘한국’, 그리고 ‘집’이라는 견고한 성을 벗어나 자유가 된 우리는 각자가 안고 있던 문제와 걱정거리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걸으며 즐거워했다.

 

밤이 되면 와인잔을 기울이며 키스재럿과 빌 에반스와 찰리 헤이든과 카를라 브루니와 재클린 뒤프레를 함께 듣고, 작은 박물관에 들어가 함께 작품을 감상하고 벼룩시장에서 각자의 취미에 맞는 물건들을 골랐다.

 

예약이 안 되면 입장이 안 되는 수백 년 역사의 부티크 호텔에 (김관장님의 눈빛에 넘어간 지배인의 배려로) 들어가 고풍스러운 엘리베이터며, 벽에 걸린 에칭화며, 곳곳의 빈티지 조명과 벽지와 가구를 구경하는 데 모두 여념이 없었다. 탐미적인 남자 셋은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일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우리가 머물던 작은 호텔의 식당 탁자 위에는 과일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파인애플이 있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견고한 탑처럼 고정돼 있던 단 하나의 파인애플을 김관장님이 가져와 숙취에 좋다며 작은 빵칼로 잘라 주셨다. 그 장면을 본 호텔 주인장의 놀라는 눈빛이란. 그래서 돌아오는 날 찍은 사진 속에는 파인애플이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2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런 소소한 사건들을 마치 중학생처럼 깔깔대며 추억한다.

 

여행은 짧고 추억은 길다.

 

파인애플이 없는 정물, 길 위에 고인 빗물의 반영이나 기차 창밖으로 사라져가는 순간 중 일부를 사진으로 남겼고 그 장면들은 우리에게 이 여행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앞에서 키스하던 커플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작은 밴에서 생선을 팔던 남자는 오늘도 물 좋은 생선들을 구하러 경매장에 나갔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들의 사정을 더 몰라서 좋기도 하고, 나의 친구들 사정을 지금까지 알아서 좋기도 하다.

 

우리는 마치 공전 주기가 다른 행성들처럼 각자의 우주를 유영하다가 40여 년 만에, 50여 년 만에, 60여 년 만에 일렬로 정배열이 되어 만나게 되었을 터이다. 서로가 진정으로 건강하길 바라고 서로가 진심으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

 

그래서 우리는 친구이고 또한 가족이다.

 

장소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 갤러리 기간 10.16~10.21 문의 064-760-3573

박이현 기자  2021-10-15 태그 김형석, 이탈리아, 이중섭미술관, 제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