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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스토리

박찬원 _ 사랑한다, 루비아나
박찬원은 경주마로 뛰다가 퇴출된 말(馬) 루비아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둘만의 우정과 교감을 영화처럼 사진으로 기록했다.

스토리텔링 Storytelling

영화나 문학 등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내러티브' 나 '플롯'이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과관계로 엮어진 연결을 의 미한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링과는 구분된다.

 

 

 

Rubiana Horse 05 Pigment Print 90x60 2016

 

# scene 1 만남

“안락사를 시켜야 하는데 차마 그렇게 못하고 있어요.” 목장주가 말했다. 한쪽 구석에 비쩍 마른 백마가 눈에 들어왔다. 피부는 오래 쓴 담요처럼 털이 빠지고 닳고 낡아 거칠다. 말들은 호기심이 많은데 늙은 말은 표정이 없다. 가까이 다가가도 경계하지 않는다. 멍한 눈, 아니 생각에 잠긴 눈이다. 루비아나와의 첫 만남이다. 한때는 명 경주마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는 늙어 승마는커녕 관광용이나 씨받이로도 역할이 끝났다. 죽는 일만 남았다. 보는 순간 찌르르 전율이 느껴졌다. 내 모습이다.

 

 

 

 

 

 

Rubiana, Horse 58 Pigment Print 40x60 2016

 

Rubiana, Horse 59 Pigment Print 40x60 2016

 

# scene 2 나이

루비아나는 열일곱 살이다. 90까지 사는 사람 나이로 치면 70에 가깝다. 말은 빨리 자라고 빨리 늙는다. 태어나 6개월이면 젖을 떼고 두 살이 되면 훈련을 받고 경마에 나간다. 루비아나도 만 두 살 때 첫 출전을 했고, 세 살 때부터 우승을 했다. 루비아나의 전성기는 다섯 살 때까지였다. 그 후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말은 일 년에 다섯 살씩, 사람보다 빨리 늙어간다. 달리고 나르고 새끼 낳는 역할이 끝난 말은 더욱 빨리 늙는다. 루비아나에게서 늙어가는 것이 보인다. 다음 세상을 향해서도 빨리 달린다.

 

 

 

 

 

 

Rubiana, Horse 46 Pigment Print 40x60 2016

 

# scene 3 고집

늙은 말은 고집이 세다. 사진을 찍으려면 좀처럼 포즈를 취해주지 않는다.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데려가면 바로 돌아 제자리로 간다. 늙어 볼품없어진 몸을 보여주기 싫은가 보다. 카메라를 들지 않으면 가까이 오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머리로 카메라를 밀어낸다. 그럴 때면 싱싱한 풀을 뜯어다 주고 조용히 부탁한다. “얼굴 사진 하나만 찍을 테니까 기다려줘.” 기분 좋으면 말을 들어준다. 늙으면 자존심이 생명이다.

 

 

 

 

 

 

Rubiana, Horse 27 Pigment Print 40x60 2016

 

# scene 4 구름

낮게 깔린 구름 속에 백마가 서 있다. 하늘의 신비스러운 소리를 듣는다. 루비아나와 구름이 하나가 된다. 구름 빛이나 말 빛이 같다. 구름이 움직이면 말도 움직인다. 루비아나도 구름이 되려나 보다.

 

 

 

 

 

 

Rubiana, Horse 35 Pigment Print 40x60 2017

 

# scene 5 연습

루비아나가 쓰러졌다. 늙은 말은 누우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왈칵 눈물이 나왔다. 죽어가고 있다. 눈도 감았다. 숨도 쉬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다. 참 못됐다.죽은 줄 알았던 말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린다. 움직인다. 안 죽었다. 얼른 싱싱한 풀을 한 웅큼 뜯어와 먹였다. ‘살아나라! 살아나라!’ 빌었다. 드디어 눈을 떴다. 안간힘을 쓰며 일어난다. 늙은 말이 살아났다.

 

 

 

 

 

 

Rubiana, Horse 47 Pigment Print 40x60 2017

 

# scene 6 무게

머리가 무겁다. 시간이 갈수록 머리가 힘들어진다. 늙어가는 데도 순서가 있다. 먼저 다리 힘이 약해진다. 엉덩이와 몸체에서 살이 빠진다. 가슴뼈가 드러난다.
털이 가늘어지고 힘이 없다. 가장 늦게까지 머리를 받치는 목은 튼튼하다. 목에 힘이 빠지면 떠날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이다. 루비아나가 힘이 부친 듯 쇠난간에 머리를 걸치고 쉬고 있다. 무거운 머리가 축 늘어진다. 깜짝 놀랐다. 머리가 신호를 보낸다.

 

 

 

 

 

 

Rubiana, Horse 33 Pigment Print 40x60 2016

 

# scene 7 자유

루비아나가 자유를 찾았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으로 훨훨 날아갔다. 마지막 사진을 찍고 제주도를 나온 다음 날 루비아나가 쓰러졌다. 하루 정도 버티다 숨을 거두었다. 죽음을 보지 못했다. 동백꽃으로 울타리 처진 목장의 아래 마당에 묻어주고 막걸리 한 병 부어주며 명목을 빌었다 한다. 무덤에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멍해진다. 갑자기 의욕이 없어졌다. 찍을 사진도 없다. 친구가 내 영혼도 조금 떼어갔다.

 

 

박찬원 하루살이, 돼지, 말 등 다양한 동물 사진을 찍어왔고, 그것을 통해 ‘생명의 의미, 삶의 가치’를 말한다. 사진은 물론 수필, 수채화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 아홉 번째 개인전 <사랑한다, 루비아나>를 열었다.

 

 

월간사진 기자  2020-07-01 태그 박찬원, 사진가, 스토리텔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