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ART

포토 스토리

사진가의 초심(初心)
첫 작품, 첫 개인전, 푸릇한 그 시절 열정을 소환하다. 박진호, 임안나, 조춘만 그리고 박형근.

 

박진호 _ 제록스 아트, 1992

사진가로서의 첫 전시. 표현에 대한 열망보다는 어떻게든 좀 더 살아야겠다는 발버둥으로 준비한1992년 전시, 박진호는 그때를 여전히 기억한다. 단체전에 한 번 참가하지 않고 무작정 감행한 개인전이었으니까. 전시 타이틀 <아노미>. 혼란했던 당시 그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는 말이다. 그는 복사기에 자신의 몸을 올려놓고 촬영을 진행하는, 일명 ‘제록스 아트(또는 카피 아트)’로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자신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복사기 유리판에 강하게 밀착시켜 복사한 다음, 복사된 이미지의 일부를 접사 촬영한 후 확대 인화하는 방식이다.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된 피부 표면과 주름, 몸의 굴곡 등이 도발적이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현실의 몸이 사진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추상이 된 것이다. 이후 2000년 열린 <몸 너머> 전시까지, 박진호는 줄곧 자신의 몸과 삶에 집중했다.

 

그가 오는 3월 14일부터 5월 31일까지 파주 헤이리 갤러리움에서 1부, 2부로 구성된 개인전을 연다. 일종의 회고전 형식이며, 전시 타이틀은 <세잔의 앵무새>. 28년 전 첫 전시를 준비할 당시 그는 ‘세잔의 앵무새’란 단어를 되뇌었다고 한다. 화가 세잔이 키우던 앵무새가 수시로 "세잔은 위대한 화가다."를 반복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박진호 역시 그 단어를 반복하면서 혼돈에 찬 자신을 담금질했다고. 29세에 완성한 그 시절 작품으로 30년 후 다시 관람객을 맞는다니, 작가에겐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글 | 박현희(편집장)

 

 

임안나 _ 밤 11시 49분이다, 2004

재난, 전쟁, 테러 등의 위협에서 기인한 ‘불안함’을 연극적 화법으로 표현한 <불안의 리허설>로 최근 국내외 사진상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있는 임안나의 비교적(?) 초기작이다. 대다수가 그의 시작이라고 알고 있는, 임안나 작업세계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잘 알려진 <White Veil>(2008)보다 무려 4년이나 먼저 빛을 본 사진이다. 한눈에 봐도 지금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스케일,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실험적이다. 부모님의 공간, 육체 옆에 청춘남녀의 몸 일부를 입힌 얇은 천을 배치한 다음 촬영했다. 임안나는 작업에 대해 “부모가 연민의 대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할 즈음, 내 생의 시작점을 만든 두 사람의 모습과 일상 공간은 나의 삶을 반영하는 조각물과 박물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삶의 어느 시점이 되면 몸은 사라지고야 마는 소실점으로 향하고 있지만, 정신은 시간의 방향과 속도에 동조하지 않으려 한다.”라고 설명한다. 제목인 <밤 11시 49분이다>는 오늘이라는 얼마 안 남은 시간과 내일이라는 머지않은 시간 사이에서, 마치 어떤 사이와 사이 아득한 틈에 잠시 발이 빠져 어쩌지 못하는 부재를 경험하는 찰나를 의미한다. 에디터 | 박이현

 

 

조춘만 _ 울산 부곡동, 1998

다큐멘터리 분위기 물씬 풍기는 흑백사진이 산업사진가 조춘만의 초기작이라는 게 믿기는가. 얼키설키 얽혀 있는 산업현장의 철 구조물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을 차갑게 담아내는 그에게도 이렇듯 따스한 시선이 있었다니. 이게 바로 한 사람의 역사를 보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 생계를 위해 1974년부터 조선소와 제철소 등에서 일을 한 조춘만은 취미로 사진을 찍다가 1994년 청소년 복지회관에서 사진을 배웠다. 이때부터 사진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40대 중반 사진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작업에 돌입했다. 그의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사진은 ‘향수’로 점철된 결과물이다. 부곡동은 1978년 조춘만이 동료들과 월세방에 살며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던 동네다. 20년이 지나 그는 라이카 R6.2를 들고 이곳을 다시 찾았다. 당시 부곡동에선 철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추억의 동네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부곡동의 일상이었다. 푸르른 청춘의 시간이 머물렀던 마을이 사라지는 것에 눈시울이 붉어진 가장의 모습, 할머니와 손녀의 소박한 밥상, 색이 바랜 결혼사진 등을 기록했다. 이들과 마주한 조춘만은 아마 더 좋은 곳으로 가긴 어렵겠지만, 오늘을 꿋꿋이 살아가는 그들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졌다고 한다.

에디터 | 박이현

 

 

박형근 _ 태엽 감는 새, 1998

초현실주의 사진을 보는 듯한 박형근의 초기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업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1998년 제작된 첫 시리즈에는 세상을 향한 그의 젊은 시절의 내면세계가 담겨있다. 군대를 막 전역한 20대의 그는 장막에 가려져 있던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가까웠던 지인 몇몇이 세상을 떠나며 생(生)과 사(死)의 허망함을 자각했고, 당시 세상은 오류와 부조리로 가득해 보였다. 그는 그렇게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 상실의 감정을 너무도 이른 시기에 맛본 셈이다. 젊은 사진가로서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새’였다. 자유롭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사소하고 미약한 존재. 새는 자신의 상황과 세상이 지닌 양가적인 측면을 모두 닮아 있었다. 박형근은 이를 토대로 1998년 <태엽 감는 새>를 작업했다. 퇴행적이고 꿈같은 현실을 느낀 바, 또렷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지양하며 장면들을 연출했다. 그리고 흑백사진에 조색 작업을 더했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탄생된 사진들은 비현실적인 구성 속에서 음산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그의 첫 작업은 1999년 인사동에 위치했던 ‘사진마당’ 전시를 통해 세상의 빛을 봤다. 그에게 20여년 동안 작업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던 첫 작품은, 자신이 다각적으로 느낀 젊은 날의 감정들을 보는 이에게 전달해준다. 에디터 | 김영주

박이현 기자  2020-03-11 태그 박진호, 임안나, 조춘만, 박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