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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스토리

대구사진비엔날레 _ 심상용 예술감독 선임
오는 9월 10일부터 11월 2일까지 진행되는 <제8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서울대학교 심상용 교수가 선임됐다.

 

<제8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선정된 것을 축하한다. 주제전 ‘누락된 의제(37.5 아래)’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보도자료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시는 ‘포스트 펜데믹 시대를 준비하는 길과 긴밀하게 결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진이라는 예술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전례 없는 펜데믹 상황이다. 체온 37.5℃를 지시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잠재적 감염지수인 그것은 사회적 격리, 강제적 단절을 의미하는 위협적인 것이 되었다. 코로나-19는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란 예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재앙적인 것들의 서막일 수도 있다. 그래서 코로나바이러스와 인간은 ‘적대적 공생 관계(antagonistic cooperation)’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정작 직시하도록 하는 것은 37.5℃를 넘는 고열이 아니라, 그 아래(below), 즉 의학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제2, 제3의 코로나 사태를 몰고 올 것이 확실한 삶의 방식, 찌들고 병든 사유와 왜곡된 인식, 정신적 표류 같은 진실의 환기다.

2007년 독일 하일리겐담 해변에서 열렸던 G8 정상회담 관련된 한 기록이 ‘누락된 의제(37.5 아래)’의 단초가 되었다. 아프리카가 중심주제였지만, G8 정상회담에 올려진 중요한 두 주제는 ‘민간투자 보장’과 ‘특허권의 광범위한 보장’이었다. 이는 모두 세계 총생산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500대 다국적 기업의 이익 확장에 관련된 것이다. 정작 ‘기아’ 같은 단어는 회담 의제로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이것이 5초마다 어린아이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고 있는 이행성의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행성의 미래를 파멸로부터 돌이키는데 필요한 의제들은 지속해서 누락되는 중이다. 철부지가 아니라면, 이런 일이 G8 정상회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가 ‘누락된 의제들’의 발언을 듣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 누락된 의제들을 다시 우리 이성과 지성에 깃들게 하는 것, 그것들의 요청이 다시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게하는 것, 일렁이는 자본과 권력의 파도 앞에서 다시 의식을 흔들어 깨우는 것, 이는 포스트 팬데믹(Post pandemic) 시대를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준비사항이기도 할 것이다.

 

2018년 <제7회 대구사진비엔날레> 현장 사진

 

코로나-19로 작가들의 이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작가군은 어떻게 구성할 계획인가. 최근 광주&부산비엔날레가 보여준 것처럼 유럽 중심에서 탈피하는 움직임이 반영될지 궁금하다.
의도적으로 유럽 중심에서 탈피하려는 행위는 자칫 유럽 중심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부정동조로 빠질 수 있다. 탈피하기 위해 집착하는 행태, 집착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기제로서의 탈피 말이다. 아시아권 큐레이터를 전면에 세우고, 아시아 것들로 콘텐츠를 구성한다고 해서 해방과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의 변형된 수행일 수도 있다. 작금의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 변형된 것은 축적된 대응을 무력화하는 더욱 고약한 것일 수 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가 그렇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치게 ‘트렌디’한, 내게는 다소 공허해 보이는 몸짓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마음’과 ‘영혼’이라는 인류의 기원에까지 맞닿아 있는 주제를 시의성 짙은 비엔날레에서 다루는 문제와 그 방식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광주와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맥락에서 이번 주제전은 더 현실의 폭풍 한가운데를 향한 항해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비엔날레를 이해하는 틀이기도 하다. 펜데믹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이때, 사유와 인식의 고삐를 다잡고 세계의 폭풍 속으로 더 깊이 가 보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3백여만 명, 실제로는 아마도 6~7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것으로 추산되는, 이 시대의 맥박과 제대로 마주해보는 것이다.


<대구사진비엔날레> 5개월을 앞두고 예술감독에 선임됐다. 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 업무와 동시에 비엔날레를 준비하는 것이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감독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e.g. 전시를 위한 고민, 현실적인 예산 등). 더불어 비엔날레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짧은 기간 동안 어떤 방향성을 갖고 준비할 계획인가.
결정을 내리기 위한 숙고의 시간이 있었다. 주제전 큐레이팅이 주된 임무라는 생각이 결정의 무게를 조금 줄여준 측면이 있다. 시간이 부족한 것은 끌어안아야만 하는 문제다. 시간적 결핍을 채우는 노력은 대체로 잘못된 접근으로 끝날 개연성이 크다. 시간에 관한 문제들은 대체로 비가역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결핍은 새로운 길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결핍은 어떤 면에선 과잉이나 남아 돌아가는 시간보다 덜 위험할 수도 있다. 그것과 함께 하는 길(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아니라 전환을 위한 강한 힘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결핍 자체가 기능하도록 하는 조건을 찾는 것이다. 세부적인 내용은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지만, ‘누락된 의제(37.5 아래)’라는 주제도 그런 맥락에서 잉태된 것이다. 이것이 이번 기획에 임하고 있는 원칙적인 태도고, 전시 주제가 태동한 배경이기도 하다. 관장 업무와 동시에 비엔날레를 준비하는 것은 크게 충돌을 일으키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서로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 느끼는 양자 간의 관계다.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별문제 없이 매칭되어가고 있다.


‘관장’ 업무와 ‘예술감독’ 업무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면
서울대학교미술관은 토탈 미술관(Total Museum)이 아니다. 주로 전시와 교육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제한적인 여건이지만, 최근에는 현대미술품 수장 등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관료나 경영인 출신이 아닌, 미술사/미술이론가 출신 관장인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현대미술관, 더 좁게는 대학미술관 역할에 기여하는 것인가는 오늘날 특히 달라진 미술관 역할에 있어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다. 다만, 미술관장과 비엔날레 기획자 사이에는 많은 업무적 공통점이 있다. 1) 비엔날레(미술관) 역사와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발전적으로 이어나가는 일, 2) 이를 위해 개혁과 혁신의 지점을 포착하고, 기획 등 프로그램에 반영하는 것, 3) 현대미술(현대사진)의 논의에 참여하고 발언하기, 4) 지역사회와의 소통, 고양된 문화적·교육적 기회 제공. 이런 경험은 이번 주제전을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18년 <제7회 대구사진비엔날레> 현장 사진

 

기존 예술감독과 달리, 사진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진 않았다. 더불어 사진 작업을 연구한 저서와 논문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구사진비엔날레>에 어떤 관점/시각으로 접근할지 궁금하다.
나에 대해 우려하는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나는 (그 저의가 무엇이건) 이 질문에 대해 우려한다. 그것이 (실제로 경험했던 것처럼) 조각 전공자가 아닌 것이 공공조각품의 심사위원으로서 부적격이라고 말하는 것. 이를테면, 어떤 영역주의적, 배타적 사유와 동일한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영적 사유의 저변은 대체로 지분이나 할당 같은 권력적인 요인들과 결부되어 있다는 혐의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서 배어 나오는 우려가 이러한 것과 무관한 것이기를 바란다. 나는 <대구사진비엔날레>의 주제전 기획자의 조건이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영역적 경계나 범주적 사유의 간섭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열림이 사진 비엔날레의 미래를 살찌우는데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제안한다. ‘사진 분야’를 ‘사진 생태계’라는 개념으로 치환하면, 문제에 더 다가설 수 있다. 생태계란 해당 대상계의 생존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생명 활동, 재료의 공급, 생산, 유통, 소비, 폐기가 지속 가능한 하나의 순환을 이루는 질서 또는 상태를 의미한다. 시스템 이론에 의하면, 모든 생태계처럼 예술 생태계도 예술창작자의 교육과 창작시스템, 매개자와 매개를 위한 사회 시스템, 감상 및 시장 시스템 등 하위의 계들로 구성되고,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외부세계에 대해 닫혀있지 않다. 각각의 활동들은 예외 없이 외부세계와 결부되고, 연동되고, 소통하고, 종종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는 방식으로 뒤섞인다. 이는 어떤 생태계든 지속가능성의 조건 자체가 외부에의 열림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외부를 적대적으로 간주하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역적 개념으로 들리는 ‘사진 분야’가 존재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매우 많이 열린 상태도 작동할 것이다. 그렇기에 가담자와 비가담자, 시민과 이방인의 경계도 열린 것일 수밖에 없다. 르네 샤르(Rene Char)는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 앞에 예술의 실천이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실재를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라는 한계가 사진을 철학적 가능성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 아마 동의하겠지만, 철학은 어떤 자격 여부를 묻는 분야가 아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현대사진 흐름의 맥락에서라면야 더더욱, 그리고 그것이 관문을 통과하는 비용이나 자격이 요구되지 않는 것이란 의미라면, 나 같은 미술이론가를 ‘분야 밖’의 국외자로서, 또는 어느 정도 출입의 제한이 마땅한 사람으로 분류하려 드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근거가 박약한 담화처럼 들리는 것이다. “예술(미술) 분야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사진 분야에서는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다.”라는 진술도 다시 1980년대 이전의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인터뷰가 나의 입장을 방어적으로 표명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나에 대한 한 가지 사실만큼은 덧붙이고 싶다. 20년간 전시기획과 그 제반 여건을 가장 비중 있는 교과과정으로 가지고 있는 대학 학과에서 연구와 교육에 임했다. 적지 않은 제자들이 전국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대구사진비엔날레>의 중요한 전시기획자로 가담했던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세월 동안 많은 블록버스터 전시, 비엔날레 등이 담론형성의 기치를 내걸었다가 담론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마치고, 생산적인 논쟁 대신 스캔들로 채워지고, 열기로 데워졌다가 후사 없이 식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또한, 담론의 자루가 부러지고, 비평의 날이 오히려 무뎌지는 역설들과 마주하기도 했다. 비엔날레라는, 계기적인 형식의 블록버스터 전시에 대한 반성은 그러한 학과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나에게 늘 송곳처럼 찌르는 문제였다. 사실 지금이 순간에도 나를 정말로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이 바로 이지점이다. 스스로 던졌던 질문들, 현재 나에게 올가미가 되는 그것들에 어떤 식으로건 답해야 하는, 나를 향한 칼날 끝에 서 있는 심정이다.

 

2018년 <제7회 대구사진비엔날레> 현장 사진

 

이를 다른 시각으로 보면, ‘사진 전공’이라는 굴레는 <대구사진비엔날레>의 확장성과 연관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진행된 <대구사진비엔날레>의 특별전, 초대전시, 부대행사 콘텐츠에 큰 변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술감독으로서 생각한, ‘확장성 답보/한계’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방안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감독의 배경에서 오는 관점/시각이 기대된다. (*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사진은 매체 그 자체를 넘어, 현대미술의 확장된 양식과 태도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비엔날레의 핵심은 시대 경향을 조명하고,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의 개입이 그런 순기능으로 작동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아니었다면, 예술감독 수락이 어려웠을 것이다. 사진작가건 회화작가건, 세계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철학적 공명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한계의 성찰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 때 가능해진다. 오늘날 사진은 예술 영역에서 분리된 채 독자적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은 예술의 한 분야이며, 예술의 중심에 위치하기도 한다. 사진의 쟁점들은 실재와 재현, 주체와 대상, 존재와 시간, 삶과 죽음 등과 같은 철학 영역에 속하며, 예술과 비예술, 창조와 기술, 사진예술과 타예술 등과 같은 미학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는 궁극적으로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 파리8대학 미학과 교수 프랑수아 술라주(Francois Soulages)의 말이다. 분리주의적인 사진 이해는 경계해야 할 대상 중 하나다. 그 자체로 과거적이며, 자신을 발견하는 미학과 철학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2018년 <제7회 대구사진비엔날레> 현장 사진

 

이번 비엔날레의 전시장소는 어떤 맵핑을 상상하고 있나.
대구문화예술회관은 전시장소로서 쉽지 않은 장소적 특성을 보이는 동시에, 무언가 실험하고 싶은 유혹이 들게 한다. 마치 육각 형태의 거의 동일한 10개의 공간, 1, 2층 5개씩 병렬로 늘어선 단단한 방어진지 같이 다가오기도 한다. 이러한 ‘밀당’이 촌각을 다투는 현재로서는 즐겁지만은 않다. 몇 가지 충분치 않은 단서들을 포착하는 것에서 시작해, 초대된 작품들이 말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는 흡입력 있는 공간 연출과 배열의 밑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그것을 통해 주제의 서사성이 리드미컬하게 흐르도록 해야 한다. 공간과 서사가 긴밀하게 서로를 조율해나가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 리듬이 관람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형식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요구야말로 전시기획자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요인이자, 전시를 살아있고 춤추는 것으로 만드는 여정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대구사진비엔날레>를 기대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번 행사를 즐길 수 있는 팁을 부탁한다.
관객은 발로 투표한다. 자신에게 유의미하지 않았던 경험에 대해서는 발길을 끊는 식으로 반응한다는 의미다. 이번 비엔날레는 ‘전시’, 곧 ‘쇼(Show)’로서의 미학과 기능에 비중을 두고자 한다. 관람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즐김 가운데서 발견할 권리를 지닌다. 사진이 그들에게 ‘특권’임을 알게 하는 사진 전시가 아니라면, 그것을 성공적인 사진전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 마음에 담아둘 만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쇼로서는 임무를 다 하지 못한 것이다. 전시는 그들을 환대하는 인격적 기제요, 고양된 소통을 담보하는 사회적 기제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아우르는, 찾아지지 않은 길들을 상상하고 있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찾아진다면, 관람자들에게는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Info <제8회 대구사진비엔날레>
기간 : 09.10 ~ 11.02
장소 :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동산병원 일대 등

박이현 기자  2021-06-09 태그 대구사진비엔날레, 심상용, 누락된의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