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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컬처

사라진 풍경들
그때 거기에 있었던 누군가가 기록한, 이제는 보기 힘든 ‘추억의 한 장면’이다. 사진을 본 뒤 느끼는 감정이 ‘추억은 방울방울’일지, ‘텅 빈 가슴’일지 궁금하다.

 

서울 그 시절 _ 사진가 은효진
종로3가에 있는 단성사, 삼일고가도로 등 당시에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시간이 흘러서 보니 복원할 수 없는 귀한 어제의 모습으로 남았다. 과거에 무심히 담았던 사진들에 세월의 무게를 실으니 역사적 의미로 다가온다.

 


단성사 극장 (1987)
1907년 대한제국 수도 한성에 최초로 민간인이 설립한 극장이다. 2015년 폐관되기까지 100여 년이 넘도록 한국을 대표하는 명소였다.

 

 


남산 외인 아파트 철거 (1994)
1970년 착공, 1972년 완공된 남산외인 아파트는 남산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20년이 지난 1994년 11월 20일, 첨단 기술공법으로 철거되었다. 아파트 자리에는 남산 야외 식물원이 들어섰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1995)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1995년, 일제 36년의 상징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됐다. 상부 첨탑 제거를 시작으로, 1년 여에 걸쳐 철거 작업이 진행됐다.

 

 

삼일고가도로 (2003)
고가도로는 60~70년대 상업화로 많이 건설되었는데, 당시 공사 기술 탓에 늘 붕괴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철거 30일 전, 삼일고가도로 에서 국제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우리, 결혼합니다 _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기억은 잊혀도 기록은 영원하다. 이것을 모토로 설립된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은 지역의 생활사 및 그와 관련된 기록물을 발굴하고 꾸준히 아카이빙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1950년대부터 70년대 결혼문화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사진들이다.

 

전통혼례 (1957)
경북 의성읍 동산동에서 열린 김성근 부부의 전통 결혼식 사진이다. 신랑은 사모관대복을, 신부는 대례복을 입었다. 당시 4~5m의 한지 두루마리에 모필로 축사를 썼었고, 그 양이 많아 보이도록 초례상에 펼쳐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함잡이 (1960년대)
1960년대 친구의 결혼식에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를 문 함잡이가 신부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장면이다. 대문 앞에 잔치 소식을 듣고 미리 진을 치고 앉아 있는 노숙인의 모습도 보인다.

 

 

신혼여행 (1965)
1965년 11월 22일, 신혼여행을 다녀온 권영자, 임영대 부부가 대절한 차를 세워두고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다. 추운 날씨에 여우 목도리로 한껏 멋을 낸 새댁과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새신랑, 그 양옆으로는 친구들이 함께했다.

 

 

기미년 결혼 만세 (1979)
남재득 이경희 부부는 1978년 광복절에 선을 보고 그해 개천절에 약혼해 이듬해 삼일절 결혼식을 올렸다. 으레 그렇듯 신부 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를 치렀다. '기미년 3월 1일 방방곡곡에서 신랑신부 만세'라는 결혼식 축하 글과 함께, 옆에 쌓아둔 혼수 선물인 소비자가격 63,500원의 삼성전자 라디오카세트가 눈길을 끈다.

 

 


 


학창시절 _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에어컨과 공기청정기가 설치된 지금의 교실 풍경과는 사뭇 다른, 1950년대의 허름하지만, 정이 넘쳤던 학교와 그 시절 학생들 모습이다. 특히 교련복을 입고 있던 여학생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경북 지역민들의 기록물이 있었기에 시대의 일상을 많은 이들과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안동 옥동공민학교 수업시간(1952)
전쟁에도 학교는 문을 열었다. 제대로 된 건물도 없던 시절 겨우 흙벽을 발라놓은 안동 옥동공민학교(취학 시기를 놓친 이들을 위한 기관) 교실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책걸상도 없이 멍석에 앉아 수업을 받고 있다. 문맹타파를 위해 학구열에 불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초등학교 가정실습(1950년대)
교실 벽에는 태극기와 함께 ‘참다운 여성이 되자’는 교훈과 급훈이 걸려있다. 가정실습 수업 중이라 여학생들이 마루바닥에 옹기종기 앉아 냄비에 감자를 쪄서 뎀프라(일본식 튀김요리)를 해 먹는 요리 실습을 하고 있다.

 

 

동네친구들의 겨울방학(1974년)
도산서원 가는 길. 검정색 교복을 입고 있거나 추운 날씨에 멋을 부린 학생들의 모습이다. 길고 지루했던 겨울방학,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 마실을 다녀오던 그 시절 고등학생들은 어느덧 6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교련복 입은 여고생(1976년)
하굣길의 안동 경안여상(현 경안여고) 학생들. 귀밑 단발머리를 한 앳된 모습인 그들 모두 교련복을 입고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소중한 장면이다.

 


 


 

 

미스코리아를 꿈꾸며 _ 사진가 김운기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이기도 한 ‘미스충북’의 대회 현장을 30년 넘게 촬영했다. 참가자를 찾기 힘들었던 1960년대였기에 신문사나 미용실이 아름다운 여대생들에게 대회 출전을 권유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미스충북 드레스 심사 (1967)
대회 초창기 본선에서는 모든 참가자가드레스 심사에 온 신경을 썼다. 당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탓에 허름한 의상을 준비한 참가자들도 상당수였다.

 

 

미스청주 수영복 심사 (1980)
보수적인 시대 분위기 속에서 참가자들의 수영복 심사는 단연 화제였다. 몰래 참가자들을 보려던 사람들 때문에, 심사는 종종 주최 신문사의 회의실이나 관객이 없는 곳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광부의 이름으로 _ 사진가 최영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만 분진 사이를 헤집는 안전등 불빛, 귀를 찢는 착암기 소리, 40도가 오르내리는 지열에 땀 범벅이 된 광부들은 당시 국내 산업화를 이끈 주역이었다.

 

강원도 태백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1980년대)
600m 지하갱도에서 광부들은 교대근무를 했다. 약 25명의 광부가 한 조가 되어 8시간 동안 작업을 진행했다.

 

 

강원도 태백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1980년대)
작업을 마친 광부들은 함께 공동샤워장에서 몸을 씻었는데, 수백여 명에게 온수를 공급하기 위한 작업 역시 만만치 않았다.

 

 


 

 

30년 전 대선 유세 _ 사진가 손묵광
민주화 열기로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던 시대.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등 당대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후보로 나선 1992년 제 14대 대선 유세현장에는 언제나 유권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부산 (1992)
후보와 유세단은 주택가, 골목 등을 다니며 지지를 호소했고, 주민들은 희망 섞인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부산 사직운동장 (1992)
당시 현대그룹을 이끌던 정주영은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했다. 그의 아들 정몽준(왼쪽), 코미디언 출신 고 이주일(오른쪽에서 세 번째) 등 인지도가 높았던 당시 국회의원들이 정주영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부산 사직운동장 (1992)
유세 방법이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후보들이 운동장 등에서 대규모 선거운동을 펼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축제 현장을 방불케 했다.

 

 


부산 사직운동장 (1992)
시민들은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이 적힌 손 팻말이나 사진을 들고 유세장을 찾았고, 후보자들은 그 주변을 중심으로 짧게나마 카퍼레이드 유세를 펼치곤 했다.

 

 


 

 


09년 왕십리 에디터 박이현
2009년 <비연출 단상 _ 서울 뉴타운>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한 작업이다.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정부와 시민, 양측을 이분화하여 한쪽에만 초점이 맞춰진 재개발에 관련된 많은 사건. 그런 이분법에서 벗어나 꾸미지 않은 - 어떠한 정치색도 입히지 않은 - 지금 그대로의 서울을 보여주고 한다.”라는 부끄러운 말을 덧붙였던 기억이 난다. 먼저, 낮에 촬영한 사진 속 장소는 ‘왕십리 시범 뉴타운’이다. 이내 사라질 것만 같았던 사진 속 보호수(은행나무)는 다행히(?)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한편, 새벽에 촬영한 사진 속 장소는 ‘가재울 뉴타운’이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어 당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사진을 보다 보니, 작금의 ‘집값 상승’ 현상이 오버랩된다. 시민을 위한다는 말이 ‘그들이 사는 세상’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또 그들은 왜 아파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왕십리 시범 뉴타운 (2009)
겁도 없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 파노라마 형식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당시 사진 속 은행나무가 사라진다는 말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아파트의 상징으로 잘 살아 있다.

 

 


가재울 뉴타운 (2009)
어렸을 적 추억이 서려 있는 ‘모래내 시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 찍은 사진이다. 새벽 5시 30분, 대문만 덩그러니 남은 언덕 위에 올라가 셔터를 눌렀다.

 

김영주 기자  2021-01-07 태그 은효진,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손묵광, 최영구, 박이현